역사저널 그날 - 묘청의 난: 우리가 알지 못한 진실
묘청의 난은 고려라는 역사를 배울때
꼭 나오는 단골손님 같은 주제이며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했을것"이라 말했다.
고려사회를 뒤흔든 묘청의 난
그럼 묘청은 누구인가?
묘청은 승려이며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을 주장한 개경파와 반대대는 서경파의 수장이다.
또한 정지상과 같은 당대의 천재들이 곁에 있었다.
그럼 묘청의 난은 왜 일어났으며 진압한 장군은 누구인가?
바로 삼국사기로 잘알려진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인종이 가장 신뢰한 인물이며
유학을 숭배하고 학자이며 문인이었다. 더불어
이자겸의 몰락이후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다.
바로 그런 그가 묘청의 난 토벌 대장이 된다.
묘청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은 불타고 서경천도를 위해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기까지 했는데
인종은 가지 않았다. 이유는 인종이 서경으로 가는 도중 기상악화와
여러가지 불행이 겹쳐 생각을 바꿔 버리고
가장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묘청의 사기극이다.
그 이후 묘청은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껴 계획도 없이 난을 일으킨것이다.
묘청의 난의 결말은 묘청은 같이 반란을 일으킨
조광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조광 또한 김부식에 의한 반란이 진압된다.
그리고 나머지 정지상과 김안, 백수한 또한 처형된다.
그런데 김부식의 왕명도 없이 처형한 선택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생긴다.
바로 김부식이 라이벌로 생각하는 정지상등을
질투로 인해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사실인지는 알수 없지만 전설로 사람의 입으로 내려오는 얘기가 많다.
묘청의 난으로 인해 서경파의 몰락
그것으로 라이벌이 없는 개경파의 독단으로
몇십년후 무인시대가 도래하고 고려라는 국가의 마지막 남은 자주성마저 빛을 잃고 만다.
우리가 알지 못한 진실
하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묘청의 난으로 인해 묘청이 아닌 죽은
윤관의 아들 윤언이를 가장 아깝게 생각한것이다.
둘: 김부식에 대한 생각변화
오로지 사대만을 주장한 김부식이 아닌 당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무엇이
고려라는 나라에 현실적으로 이익이 되는 가를 먼저 생각한 김부식을 다시 한번 조명해 봐야 한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저널 그날 - 최충헌을 암살하라 : 우리나라 최초 신하의 권력 세습 (1) | 2016.08.01 |
---|---|
역사저널 그날 - 노비 만적의 난: 천민 해방을 외치다. (0) | 2016.07.19 |
역사저널 그날 - 무신정변 3일 : 무인시대의 막을 알리다. (0) | 2016.07.12 |
역사 저널 그날 - 이자겸의 난 : 최고 권력자 그는 왕이 되고 싶었는가? (1) | 2016.06.19 |